녀석이 시장에 온 손님을 노려보고 있었다. 표정이 사람을 조롱하는 것인지, 세상에 초연한 것인지, 도무지 알 도리가 없다. 고양이가 생선을 좋아한다는 세간의 상식은 최소한 서울 서대문구의 영천시장 고양이 ‘가을’에게는 해당이 안 된다. 가을이를 키우는 한은아(65)씨는 생선가게 ‘성복수산’ 주인이다. 그는 생선가게를 고양이에게 맡기고 마실도 간다. “생선은 거들떠도 안 본다”는 게 이유다. 이런 연유로 가을이는 ‘생선을 싫어하는 고양이’로 유명해졌다.

가을이의 활동무대인 영천시장은 1950년대에 문을 열었다는 게 관할인 서대문구청 쪽의 설명이다. 하지만 건축가인 김종대 영천신시장사업단장은 “성곽 근처에 시장이 발달하기 마련”이라며 “동대문시장, 남대문시장처럼 이 시장도 서대문(돈의문) 때문에 오래전부터 형성되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100여년 전 열렸던 영천장에서 유래를 찾는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북적거렸던 시장은 응암동에 이마트(2001년), 서울역사에 롯데마트(2004년)가 생기면서 손님이 확연히 줄었다고 한다. 상인들도 예순이 넘은 이들이 많아 지난봄까지만 해도 쇠락의 기운이 완연했었다. 하지만 최근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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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도시락

지난 14일 낮 12시. 영천시장 인근 건축사무소 소장과 직원 3명이 시장 안 파라솔 아래 모였다. 모두 도시락을 들고 있었다. 어째 통이 같은 모양이다. 양원모(51) 소장과 안오정(31)씨, 황남희(29)씨의 도시락에는 도라지무침과 잡채, 제육볶음 등의 한식이, 24살의 막내 한지선씨 도시락에는 크림치즈빵이 들어가 있었다. 한씨는 “좋아하는 메뉴가 달라도 같이 식사할 수 있어서 좋아요”라고 말했다. 이들은 이날 점심으로 ‘고루고루’를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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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루고루는 지난 9월부터 영천신시장사업단이 시작한 도시락 뷔페 사업의 이름이다. 시장 안의 3곳에서 파는 5000원짜리 쿠폰을 구입하면 빈 도시락통을 같이 준다. 쿠폰은 고루고루에서 따온 ‘ㄱ’자 모형이 걸린 점포 22곳에서 사용할 수 있다. 마음에 드는 먹거리를 골라 도시락에 담으면 자신만의 도시락이 완성된다.

참여 점포는 떡볶이, 모듬전, 각종 한식반찬, 죽, 순대 등을 ‘고루고루’ 파는 가게들이다. 요리연구가 박종숙씨가 제공한 레시피대로 만든 3가지 영양밥도 판다. 김종대 사업단장은 “두 달도 안 됐는데 하루 30~60명이 올 정도로 반응이 좋다”며 “주로 20~30대 젊은 직장인과 인근의 안산에 등반 온 이들이 많다”고 했다. 매주 목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오전 11시부터 3시간만 운영한다.

2. 떡볶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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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시장의 ’영천떡볶이집’

영천시장의 진면목은 맛 골목이라 해도 될 정도로 많은 먹거리 점포다. 길이 250m 시장의 137개 점포 가운데 40%인 54개가 먹거리를 파는 곳으로, 다른 재래시장보다 그 비율이 높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유난히 떡볶이집이 많다. 20~30년 전에 주변에 떡 도매를 하는 공장이 많았다고 한다. 가장 유명한 떡볶이집은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 방향 초입에 있는 ‘원조떡볶이’다. 에스비에스(SBS) <백종원의 3대 천왕>에 나와 유명해졌다. 통인시장에 ‘기름떡볶이 할매’가 있다면 영천시장에는 ‘원조 할매’가 있다. 주인 방복자(73)씨는 40년간 영천시장에서 떡볶이를 팔았다. 충남이 고향인 방씨는 영천시장이 제2의 고향이다. 그는 1인분에 2000원인 가격을 10년 넘게 올리지 않고 있다. 어묵육수에 고춧가루, 할매표 수제 양념을 손가락 두 마디 크기의 쌀떡과 섞어 끓인다. 방씨는 “우리 처마에서 떡볶이 먹다가 눈이 맞아 결혼까지 골인한 이들도 있다”며 단골 자랑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원조할매가 조금 매운 반면 25년 역사의 ‘영천 떡볶이집’ 떡볶이는 조금 달다. 직접 만든 김말이는 도톰한데 당면이 꽉 차 있고 튀김옷이 얇아 맛깔스럽다. 그런가 하면 ‘갈현동 할머니 떡볶이 둘째네’는 국물떡볶이를 판다. 떡볶이 마니아들 사이에서 명성이 높은 ‘갈현동 할머니 떡볶이’의 주인 할머니 둘째 아들이 운영하는 곳이다. 시장의 다른 집들이 쌀떡을 쓰는데, 이 집은 밀떡을 쓴다. ‘나리네 떡볶이’와 ‘현대 떡볶이’는 알싸한 매운맛이 매력이다.

3. 꽈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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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시장의 ’영천원조꽈배기’.

원조할매만큼이나 인기가 많은 가게가 꽈배기 전문점 ‘영천 원조꽈배기’다. 1시간에 700개가 팔릴 정도다. 4개 1000원. 설탕에 굴린 꽈배기는 기름기가 적은 게 장점이다. 지름 93㎝ 크기의 무쇠 가마솥에 튀겨내는 소리가 정겹다. 주인 윤영섭(62)씨는 1984년부터 꽈배기를 튀겼다. 윤씨는 “이 동네가 원래 꽈배기로 유명한 곳”이라며 과거에는 15곳도 넘었는데 지금은 5곳 정도만 남아 도소매업을 겸하고 있다고 한다. 시장 안을 걷다 보면 역사가 오래된 ‘옛날맛 꽈배기’, 직접 팥을 삶아 꽈배기와 함께 도넛 재료로 쓰는 ‘수정 꽈배기’, 2년 전 시장에 들어온 ‘못난이 찹쌀꽈배기’를 발견할 수 있다.

4. 껍데기

영천시장에 간식만 많은 것은 아니다. ‘이모네 껍데기’의 주인 김인심(64)씨는 마장축산물시장에서 가져온, 족발처럼 삶은 돼지꼬리와 직접 만든 양념으로 버무린 돼지껍데기, 닭발 등을 판다. 야들야들 부드럽고 쫄깃해서 피부가 탱탱해지는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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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영천시장의 ‘이모네 껍데기’, (오른쪽) 영천시장의 ‘찹쌀손순대집’.

5. 찹쌀순대

끓일 때 캐러멜소스를 넣지 않아 허연 족발을 파는 ‘양식이네’, 3~4일에 한번 직접 순대를 만드는 ‘찹쌀손순대집’도 있다. 양식이네 주인 배정무(74)씨는 “손님들이 색이 진한 족발은 안 찾는다”고 한다. 방송에도 여러 번 나온 유명한 ‘석교식당’에서 사골 육수를 팔팔 끓이는 풍경도 정겹다. 이 점포들의 메뉴는 1만원대를 넘지 않는다.

6. 해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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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시장의 ’독립문맛집’의 회덮밥.

고기류가 식성에 맞지 않는 이들이 찾는 가게는 해산물 전문 식당이다. 각각 개성이 강하다. ‘독립문맛집’은 주인 송동호(55)씨의 고향 속초에서 직송해 온 생선을 2~3시간 숙성시킨 선어를 판다. 철에 따라 생멸치회, 주꾸미, 민어, 곰치, 도치, 알밴 도루묵, 양미리, 전어 등을 맛볼 수 있다. 직장인들이 회식하기 좋은 식당이다. 걸어서 2분 거리에 있는 ‘석교수산’은 활어전문이다. 푸짐한 한 상이 나온다. 킹크랩, 대게, 로브스터, 민물장어를 노량진수산시장처럼 자릿값 3000원을 더 주고 맛볼 수 있는 곳도 있다. 특별한 이름도 없이 커다란 글씨로 ‘킹크랩, 대게, 랍스타’라고 적힌 간판만 있다. 1㎏당 4만5000~5만5000원이라고 적힌 시세표가 눈에 띄는 가게다. 안으로 들어가니 주인 이채현씨가 막 삶아 김이 모락모락 나는 킹크랩을 가위로 뚝뚝 자르고 있었다. 그는 “시세는 늘 바뀐다”고 했다.

+) 다리가 아플 때쯤 떡카페 ‘떡마을’이 나타난다. 홍대 인근 맛 골목에나 있을 법한 세련된 곳이라 눈길을 잡아끈다. 15년 동안 떡을 만들어온 주인 장은주(55)씨는 “장 보다 잠시 수다 떨러 오는 분들이 많다”고 했다. 팥빙수나 다양한 예쁜 떡을 먹으면서 차 한잔 하기 좋다.

영천시장 맛 여행을 할 때 잊지 말아야 할 한 가지는 현금이다. 카드 결제가 되는 곳이 적다. 밥값을 낼 수 있을 정도의 현금을 준비해 가는 게 좋다.


출처: 허핑턴포스트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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